여행이나 답사라고 이름하지 않아도 좋다. 보이면 보고, 들리면 듣고, 바람과 햇살이 좋으면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그러기에는 걷기가 제격이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그냥 걸음으로 서너 시간을 걸었다.
킬(Kiel)의 북쪽 프로옌스도르프(Projensdorf)에 있는 숲을 지나 운하를 건너보기로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막연히 걸었다. 북쪽으로 가고이겠거니 생각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났으려나 운하가 가까워진 듯 했고, 멀리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다리가 보였다. 작년 9월 말 하늘이 참 깨끗했던 어느 날 그 다리를 자전거를 타고 건넜던 기억이 났다. 풀밭 사이 작은 길을 따라, 철조망을 넘어 가파른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나고서야 지난 가을 그 다리 위에 다시 설 수 있었다. 하늘은 가끔 구름 사이로 해가 잠깐 잠깐 보이기는 했지만 그 가을 파란 하늘은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건넜던 길을 천천히 걸어서 건너는데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이것이 천천히 걷는 재미겠지. 녹슨 난간에 니콜과 스벤 두 사람이 걸어놓은 자물쇠가 보인다. 백년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리, 그리고 그 다리 난간에 묶어놓은 녹슨 자물쇠.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옮기는데 서울 남산 만큼은 아니지만 소복한 몇 개의 자물쇠가 더 달려있다. 왜 그걸 전에는 못봤을까? 자전거가 너무 빨랐나?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푸른 들판을 보면 다시 걸었다. 해가 쨍하니 나는 데 외투를 벗었더니 봄 기분이 더 나는 것이 한결 기분이 좋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어서 알트비텐벡(Altwittenbek)을 지나 노이비텐벡(Neuwittenbek)까지 걸었다. 교외의 작은 마을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부활절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이집 저집 부활절 장식이 보인다. 집도 시내의 복잡한 다세대 주택보다 훨씬 좋다. 집집 마다 차고에는 좋은 차도 보이고 다 좋은데, 너무 조용하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다. 대도시의 복잡함과 시끄러움이 싫지만 이런 전원의 고요함은 아직은 적응이 되지않는다. 여유로운 노년이라면 나쁘지는 않을 것도 같다.
어제의 종착역 노이비텐벡. 원래부터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열차가 서는 곳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있지만 열차는 서질 않는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 앞에는 작은 가게가 있고, 자율소방서도 있다. 삼십여분 버스를 기다리는 데 비가 제법 세차게 내린다.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질 않는다. 다행히 가게 아주머니가 오셔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돌아갈 요량으로 가게로 들어갔다. 개업 15주년이라고 커피와 작은 케익 한 조각을 얻어먹고 아주머니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작은 가게가 있었다는데, 요즘은 슈퍼마켓이 들어서면서 하나 둘 문을 닫았다고 한다. 두 마을을 합쳐 천 명이 조금 되지 않는 인구, 작은 가게 하나...... 가게는 작아도 별별 거 있을 건 다 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참 소중한 가게가 아닐까 한다. 가게 이름도 만남상회(Markt Treff)다. 아주머니가 오래 오래 가게 문을 열 수 있기를 바라본다.
따뜻한 커피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를 맞으며 다시 걷는다. 지나온 길을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볼거리가 없고, 힘도 빠진 상태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해가 살짝 나던 길과 비가 내리는 길은 뭔가 달랐고, 돌아가던 방향에서 본 들판은 달리 보였다. 기분탓이었겠지.
4월의 중순 어느 오후. 날씨는 오락가락 했지만, 길 위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소소한 것들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따뜻한 커피로 가슴은 따뜻했던 길이었다. 또 다른 재미를 기대하며 다음 주에는 다른 길 위에 서게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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