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9.

무작정 나서는 답사 - 동래읍성 그 세번째

세번째 답사다. 귀찮음을 떨치고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또 타서 사직동으로 향했다. 세번째 답사는 동래읍성 서쪽에 있던 사직단에서 시작해서 동래읍성 안에 남아있는 골목을 살펴보고 동래고등학교, 충렬사, 이섭교로 이어지는 코스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잠깐 설명을 하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조선시대 읍성 안의 건물 배치는 (본적은 없지만) '주례동관고공기'를 따라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리를 따른다고 한다. 한양 도성도 같은 원리를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동쪽)에 종묘가, 오른쪽(서쪽)에 사직단이 위치한다. 읍성의 경우 객사를 중심으로 동쪽에 향교를,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라면, 향교 안에 있는 문묘에서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모신다. 사직단은 곡신신과 토지신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하던 사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동래 향교는 동문 밖(현재의 동래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것이 여러 차례 이전을 하다 영조 대에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사직단은 동래읍성 서쪽 5리에 있었다고 한다. 사직단이 있던 곳은 지금도 사직동으로 불린다. 서울 사직단이 있는 곳도 사직동이다.

답사의 시작은 지하철 3호선 사직역으로 잡았다. 검색을 해봤더니 사직단 터에 표지석이 서있고 위치도 나와 있어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872년 군현지도를 보면 사직단은 작은 산(언덕) 위에 서있다. 사직역 4번 출구로 옆으로 난 골목으로 올라간다. 지하철 노선이 지나가는 대로를 따라서는 많이 다녔는데 골목으로 들어서는 차를 타고 지나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 얕은 언덕을 따라 주택가가 들어섰고 언덕 마루에 사직단 터가 있다. 사직단 터가 있는 곳은 여고 마을이라는 자연 마을이 있었다. 현재는 사직단 터 옆에 여고 마을의 당산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 사당과 담장을 마주하고 천주교 대건성당이 들어서 있는 것이 색다르다. 동네 어른께 여쭤보니 매년 사당에서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큰길 건너에 있던 자연 마을인 석사 마을에도 당산이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여고 마을 당산에는 할배신을 모시고, 석사 마을 당산에서는 할매신을 모신다고 한다. 지금은 큰 길로 두 마을이 나뉘었는데 할매와 할배가 제삿밥 드리러 오시는 날은 사고 안나게 차를 막아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사직단의 터에서 동래읍성 방향으로 바라보면 지금이야 건물에 시야가 가리지만, 건물들을 지우고 나면 온천천 옆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래읍성 주변 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을 사직단 터로 잡았으니 기가 막히게 좋은 입지다. 다른 도시와 비교할 때 부산은 평지가 부족하다 생각했는데, 동래읍으로 시간적, 공간적 스캐일을 조정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읍성 북장대에서 바라볼 때는 큰 산이 앞에 있어서 답답한 느낌이었는데, 사직단에서 바라보는 방향은 큰 산이 멀리 보이니 오히려 공간이 넓어보인다.

사직단을 내려 와 여고 마을을 가로질러 동래역(지하철)으로 향했다. 중앙여고 남쪽에 '만년대'라는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872년 군현지도에는 서문 밖에 만년교가 있다. 지금 동래역 부근인 것은 맞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표지석이 있을만 한데 없는 것인지, 내가 찾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서문을 지나 동헌 앞을 지나 시장통으로 들어갔다. 호떡이 맛있다는 분식집에서 호떡을 두 개 샀다. 답사도 먹으면서 해야지 즐겁다. 읍성 북쪽을 둘러 친 산에서 크게 두 개의 물길이 나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남북으로 달리는 복천동 고분군의 양쪽으로 개천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현재 고분군 동쪽에 내성초등학교와 동래교육지원청이 있다. 내성초등학교 앞으로 반듯하게 난 길 옆으로 골목이 남아있다. 답사를 준비하면서 참고한 논문(2002, 김기혁 외, 조선-일제강점기 동래읍성 경관변화 연구, 대한지리학회 37-4호)을 참고했다. 논문에 1915년과 1930년에 제작된 지적도가 실려있다. 1915년 지적도에 남문과 동문 사이에 논이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골목은 논 양쪽을 따라 있던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 전기 읍성의 동문이 그 언저리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수안역 공사 중에 전기 읍성의 해자터가 발견된 것을 보면 평지에 들어선 성벽을 따라 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5년 지적도의 논을 전기 읍성의 동쪽 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동장대와 인생문 사이의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개천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과한 억측은 아니라고 보인다.

동래고등학교를 지나 충렬사로 향했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 부산진첨사 충장공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을 비롯한 9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사실 충렬사 보다는 충렬사 뒤쪽 산에 있는 군관청과 동장대를 보기 위해 간 것이었는데, 5월 31일까지는 입산통제 기간이라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섭교로 향했다. 읍성 동문을 나서 좌수영으로 가는 길에 건너야했던 다리가 이섭교다. 나무로 지었던 다리를 돌다리로 고쳐짓고 이섭교비를 세웠는데, 일제시대 독진대아문, 망미루와 등과 함께 금강공원으로 옮겨졌다가 2012년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이섭교 바로 옆에는 부산시청에서 연산교차로를 지나 안락동으로 가는 큰 길이 지나는 연안교가 있다. 연안교의 이름을 이섭교라 하거나, 이섭교를 과거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 개의 무지개(홍예)를 연결한 이섭교에서 바라보는 온천천의 모습도 지금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웠겠지. 슬슬 해도 서산에 넘어가고 답사를 마무리 해야할 때인가 보다.

다음주에는 또 어디를 가볼까......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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