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0.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훈민정음 어제 서문(출처:위키페디아)
10월 9일 한글날도 몇분 안 남았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미 새아침이 밝았겠지만, 어쨌든 독일은 아직 10월 9일이다.
(아마도 글을 게시하면 날이 넘어갈듯 하지만)
뭐 내가 국문학이나 언어학 전공이 아니니 한글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있겠냐 만은
그래도 그냥 30년 넘게 한글을(아니구나. 유치원에서 한글을 배웠으니 30년은 안됐구나)
써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냥 몇자 적어 볼까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못쓴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어왔다.
요즘에야 컴퓨터로 글을 많이 쓰니까 상대적으로 손글씨 쓰는 일이 적기는 하지만,
역시나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왼손잡이인 나를 오른손잡이로 교정하려 하셨던 부모님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라고
나는 믿고 싶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악필이다.

대학 졸업 후 처음 교단에 설 때는 칠판에 무언가를 적는 다는 게 참 미안하고 그랬다.
부산에서 4년을 근무했던 학교에 면접을 보던 날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박선생 글씨가 이래서 판서는 어떻게 할려고 그럽니까?"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당시 나의 대답이었다.
손글씨를 예전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교사라는 직업은 글씨 잘쓰는 사람이 여전히 대우받는 직업 중에 하나이다.
몇년 칠판에 글씨를 쓰다보니 한번씩은 나름 잘 쓴것 같은 기분이 들때도 있었는데,
교실 뒤로 가서 바라보는 내 글씨는 여전히 썩 아름답지 않았다.

독일로 건너 온지도 벌써 일년 하고다 반년이나 넘게 흘렀다.
소위 꼬부랑 글자를 쓸 일은 늘었지만 한글은 상대적으로 쓸 일이 적어진 것이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독일에서는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몇번 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아니고, 어학원 선생님 그리고 (외국)친구들이었다.
내 글씨를 접해본 사람들은 그럴이가 없다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는 사실말을 말할 뿐이다.

물론 독일에도 손글씨 잘 쓰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아보인다.
오죽하면 각종 문서 양식에 보면 꼭 알아볼 수 있게 쓰라는 문구가 있다.
실제로 나도 소포 배달원이 남긴 쪽지를 잘못 읽어서 한참을 그냥 기다린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내 필체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적어도 독일어는)

독일어를 비롯해 알파벳을 사용하는 유럽어는 대부분 글자의 구조 자체가 단순하다.
각각의 알파벳을 가로로 배열하고 단지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알아보기 힘든 필체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알파벳의 가로배열이 영향이 큰 것 같다.
가로배열은 낱 문자(알파벳)을 흘려쓰기에 유리한 점이 있다.
흘려 쓰기(필기체) 자체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소위 인쇄체라고 하는 필체에 비해서는 직관적으로 문자가 파악되지는 않는다.
나에게 글씨를 잘 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자만 미적인 기준으로 판단했다기 보다는, 가독성을 기준으로 한 것일테다.

그에 비해서 한글과 한자는 낱 글자의 배열 자체가 유럽어와는 완전히 다르다.
두 글자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네모난 공간을 전제로 해서 글을 쓴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한자는 상형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일종의 그림과 같다고 한다면1)
한글은 네모 안에 두 개 내지 세 개의 글자를 배치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게 다른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상당한 가치를 가지지 않나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손글씨의 이런 예술성에 주목을 많이 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났던 한 독일 학생은 외국사람들을 만나면
꼭 그 나라 글자로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해서 보관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가지고 있던 종이에 내 멋진(?) 필체로 이름을 써주었던 기억이 있다.
외국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의외로 한글 자체를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꼬부랑 쓸씨 적힌 티셔츠보다
아름다운 우리 시가 쓰여진 티셔츠를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유명 디자이너들이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한다고 하지만
그 못지않게 가까이 접하고 대중이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가끔 인터넷에서 한글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외국인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런 사진들의 대부분은 '재미있다'는 말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멋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배우 공현주씨가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쓰인 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도 보았는데,
그런 사진이 일회적인 보여주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모습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참 아름다운 한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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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자를 그리고 앉아있네!' 이런 표현도 한자의 글자 발달을 고려할 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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