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승천일. 빨간날이다. 진하게 한 번 걸어보겠다고 마음먹고 샌드위치부터 시작해서 바나나, 초콜렛, 이것 저것 사오기는 했는데, 결국 또 깔끔하게 접고 쿨하게 늦잠을 잤다. 그래도 하루를 그냥 공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챙겨서 집을 나섰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 살고는 있지만 깊은 만의 안쪽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저 호수같이만 보일 뿐 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달리며 보는 그 바다와 같은 시원한 맛이 없다. 좀 더 시원한, 탁 트인 바다가 항상 그리웠다. 그래서 오늘은 수평선을 보며 걸을 수 있는 발트해를 따라 난 곳으로 향했다.
5월 중순인데도 바람은 여전히 차다. 나에게는 찬 바람일지 모르지만, 길고 긴 겨울을 버티고 봄을 기다려온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반가운 바람일 것이다. 좁은 만의 바깥쪽에 자리잡은 올림피아 첸트룸(Olympia Zentrum)의 항구는 요트로 가득 차 있다.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이미 많은 요트가 바다를 누비고 있다. 언뜻 봐서는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보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요트 수가 더 많아 보인다. 6월 말 킬러 보헤(Kieler Woche, 매년 6월 말에 개최되는 세일링 축제) 때는 저 바다가 수 많은 돛으로 덮이겠지.
올림피아 첸트룸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바다를 보며 북으로 걸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발트해를 따라 나있는 400km가 넘는 도보여행 루트의 일부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측량국에서 발행하는 1:5만 여행지도에는 도보여행자와 자전거여행자를 위한 길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Europäische Fernwanderwege(유럽 장거리 도보여행길)이라고 지도에 나와있어서 대단한 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슈트란데(Strande)에서 뷜커 등대(Bülker Leuchtturm)까지 몇 킬로미터 정도는 포장되어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바다를 끼고 말 그대로 걷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졌다. 바다와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멀리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닿게되는 에컨푀어데(Eckernförde)도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까지 가야지 했던 곳인데, 그저 멀리서 바라 볼 뿐이다.
대도시가 아니라 작은 도시에 살아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도시를 벗어나면 자연을 가깝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몰론 시내에도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 나쁘지 않지만, 공원은 공원일 뿐 자연 그대로의 맛은 아무래도 덜하다. 도시를 떠나지도 못하면서 자연을 항상 동경하는 것은 도시에 사는 이의 로망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도 몇 년 사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늘면서 자전거 도로도 속속 생기고 있다. 이와 더불어 걷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 같은 도보여행길이 인기를 끌면서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도보여행길 개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2009년 여름 제주 올레길의 몇 구간을 걸었다. 그때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레길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을까……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다.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걷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로 출퇴근 하는 사람이라도 하더라도 차가 있는 곳까지는 일단 걸어야 한다. 최근의 걷기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자동차에 익숙해져 가는 생활에 대한 반대급부일지도 모르겠다. 걷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일이다. 어디 유명한 데를 꼭 가서 걸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물론 좋다고 이름 난 곳이야 두말 할 것 없겠지만, 주변의 일상적인 곳도 찬찬히 걷다 보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도 보이고 색다른 재미를 준다. 돈을 들여가며 멀리까지 가서 고생하며 걷고, 그 곳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걷기는 절대로 건강한 걷기가 될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도 직접 걸어보지 않고, 올레길이며 둘레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까운 곳부터 천천히 둘러보기 몰랐던 재미를 찾아보길 바란다.
풍경이 이렇게 좋은 곳이 가까이 있으신 듯 해 부럽군요. ^^
답글삭제한국과 비교하면 독일은 도시도 녹색이 강하죠. 시내에 공원도 많고, 보통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자연을 가깝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너무 평탄한 북독일에 있다보니 저는 오히려 매일 산을 볼 수 있는 한국이 그립습니다. 미국은 또 다르겠죠^^ 블로그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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