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학 교과서를 보면 스페인은 덥고 건조한 여름과 온화한 겨울로 대표되는 지중해성 기후(Cs)로 분류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기후 구분이 갖는 근본적인 스캐일의 한계를 생각할 때 앞서 밝힌 기후의 특성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한겨울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부산역에 내려 따뜻하다 느끼는 것은 부산과 서울의 기후가 사람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는 뜻이다. 하물며 대한민국 각지의 기후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 스페인이라고 다를리 있겠는가.
앞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길의 초반 1/3 정도는 포도밭과 올리브밭 사이를 지나는 길을 따라 걷게 된다. 포도와 올리브는 지중해성 기후를 대표하는 작물이라고 학창시절 지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는가? 덥고 건조한, 사하라 사막과 비슷한 기후를 보이는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작물이 지중해성 기후를 대표하는 작물이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포도와 올리브 그리고 오렌지 등이 그런 작물에 속한다. 물론 4년 전 얘기기는 하지만 독일에서는 슈퍼마켓에서 5유로 정도 하는 와인이면 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했었는데, 스페인에서는 3유로 정도에도 괜찮은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독일 남부에서도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하기는 하지만 독일 와인을 고급 와인으로 취급하진 않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카미노를 걸으며 만나는 포도밭을 보면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2월에 접어들면서 슬슬 포도농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포도주 외에도 스페인 오렌지도 참 맛이 좋았다. 물론 싸다. 오렌지 1kg에 2유로도 안되니까 부담 없이 사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먹는 얘기는 이정도로 하고, 카미노를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사실은 날씨였다. 대충 어떨 것이다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짐작하기 힘든 것이 유럽의 겨울 날씨다. 물론 서유럽이나 북유럽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화하긴 하겠지만 오락가락 하는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다행인 것은 내가 걸었던 30일 중에 비가 내린 날은 단 8일. 생각보다 날씨가 좋았다. 그리고 2월 들어서는 낮에는 15도 가까이 기온이 올라갈 정도로 따뜻했다. 평년보다 따뜻한 겨울이었을 수도 있고, 암튼 개인적으로는 운이 좋았던 편이다. 겨울 날씨는 워낙 예측하기 힘들어서 계속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겨울에는 비에 대한 대비는 필수다.
비가 내리는 날도 힘들었지만, 이틀, 사흘 정도는 강풍에 고생하기도 했다. 동에서 서로 가는 카미노에 서풍이 미친듯이 부는 날엔 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나의 카미노에서 가장 혹독한 날씨는 미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던 날이다.
겨울은 악천후와 추위에 대비 해야한다면 여름은 무더위가 문제가 된다. 여름에는 걸어보지 않아 얼마나 더운지 말하기 힘들지만, 한여름 작렬하는 태양, 그날 한 점 없는 카미노를 걷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길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보면 대충 여름 기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앞서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길 옆에 있는 풀이나 나무는 사막이나 사막 주변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을 법한 것들이다. 한국의 숲에서 흔히 보는 그런 나무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산지가 많고 서풍을 가장 먼저 받는 서쪽의 갈리시아 지방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보인다. 메세타를 지나며 만나는 황량한 평원이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숲으로 바뀐다. 잎이 넓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카미노도 그런 숲 사이를 지난다. 카미노의 초중반에 만나는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기온의 차이 보다는 강수량의 차이가 만드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활"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이런 대사를 날린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카미노에서 날씨는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평한다고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비,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들판에서 순례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저 걷거나, 적당히 쉴 곳을 찾아 쉬는 것 외에는 없다. 이것 또한 카미노다. 다음에 다시 카미노를 걷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걷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절대 여름을 선택하진 않을 작정이다. 나는 그렇단 말이다. 카미노를 소개하는 여행 팟캐스트에서는 가장 걷기 좋은 계절이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날 때라고도 하더라. 결국 날씨는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별 방법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날씨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대비를 잘 할 필요는 있다. 그것이 카미노의 날씨를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혹독한 날씨를 견디며 걷는 일은 색다른 경험을 선사할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시라. 날씨는 날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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