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송정(2016.4.16.) |
남들은 봤던 영화 몇 번이고 또 보고, 또 봐서 대사를 외우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경우에는 똑 같은 영화를 몇 번씩 봐야하지만 순수한 개인적인 취향은 그렇지 않다. 책도 마찬가지다. 소설이고, 철학이고,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 읽은 때는 거기에 꽂혀서 단숨에 읽은 책도 다시 보는 일은 잘 없다. 이상하게 그쪽으로는 흥미가 잘 생기질 않는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라고 한다면 갔던 곳을 다시 가는 것은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걸 보면 천성이 그런가 보다 할 따름이다. 그러니 지리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어쩌면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토요일에는 마음이 답답해서 무작정 차를 끌고 북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산 집에서 출발해서 양산에 있는 형과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해서 경주를 지날 때 즈음에도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안강을 지나 기계, 죽장을 넘어 자연스럽게 청송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고 있었다.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긴 하지만 운전이 힘들 정도는 아니다. 죽장에서 현동으로 넘어가는 꼭두방재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딱히 대단한 이유를 들기는 어렵지만 그저 평해에 있는 월송정이 보고싶었다. 그러고 다시 차를 몰아 현동, 청송, 진보, 입암, 영양, 일월, 온정을 지나 평해까지 내리 달려 월송에 도착하니 6시다. 잔뜩 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곧 비를 뿌를 듯 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월송정 주변을 휘 돌아 나오면서 옛날 생각이 났다. 1999년 3월 대학 입학 후 첫 답사 이틀째의 마지막 답사지 중에 한 곳이 이곳 월송정이었다.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월송정 앞 계단에서 찍은 단체사진이 그날을 추억하게 할 뿐이다. 그때는 참 좋았는데, 아무 걱정도 없었고. 그때가 그립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가을로'에도 월송정이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 현우(유지태 분)가 세진(엄지원 분)에게 길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어, 나 저기 가봤는데!"라는 말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하나, 둘, 셋!' 답사 사진을 찍던 그날로 잠시 돌아갔다. 물론 영화 속 다른 곳들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 장소들 때문에 나는 그 영화에 매료되었지만, 아마도 월송정에서의 기억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2006년 12월(영화 '가을로'는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봉작이다) 친구와 함께 영화 속에 나온 불영사와 월송정을 찾았다. 그날의 월송정은 파란 하늘 아래 있었다.
세번째 방문은 2009년 봄이었다. 당시에는 절친 두 명과 함께 두달에 한 번씩 답사와 여행의 사이를 어중간하게 줄타기 하던 때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놀러다니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리교사 셋이 다니는데 답사라고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5월의 어느 봄날 아침 일찍 부산을 출발해서 영주를 들러 소수서원과 부석사를 둘러보고 봉화 닭실마을을 지나 태백산맥을 넘었다. 4시가 넘어서야 월송정에 도착했다. 영주에서는 살짝 더웠는데 월송정에서 바람이 참 시원했던 걸로 기억한다.
월송정 정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월송정의 장소감은 그곳을 찾는 내 안에서 구성된다. 같은 곳이지만 같은 곳이 아닌 것은 기억을 구성하는 다양한 장면과 느낌의 화학작용 때문이다. 혼자서, 또 친구들과, 답사 일정 중 한 곳으로..... 나에게 월송정은 참 다양하다. 매번 날씨도 달랐고 그날의 내 마음도 다르다. 아마 다음 방문은 또 다른 기억으로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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