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3.

재개발의 그늘 - 골목은 없다


독일로 떠나기 얼마 전,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마침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나가는 길에 조금 일찍 나서서 옛날 살던 골목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어린 시절은 태권도장을 다닐 즈음이니까 대여섯 살 정도까지다. 그 이전 기억은 없다. 요즘은 전 국민이 사진작가고 동영상 촬영감독인 시대라 아이들 어린 시절 기록을 남기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만은 내 어린 시절은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사라진 내 기억을 복구해줄 사진 한 장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내가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앞서 답사에서도 밝혔지만(밝혔나?) 동래 향교 부근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당시 명륜초등학교 후문을 바로 앞에 있던 골목 안 한 집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주인집이 있던 건물이 한 채 있었고, 그 건물을 끼고 돌아가면 큰 무화과 나무가 있는 큰 마당(정원?) 옆으로 ㄱ자 모양으로 건물이 또 있었다. 우리 가족은 주인집과 같은 건물 한켠에 살았고, 안쪽에 있는 건물에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 세 집 정도가 세들어 살고 있었다. 무화과 나무 뒤로는 높은 옹벽이 있었고, 그 옹벽 위에는 집이 한 채 있었다. 항상 커튼이 쳐져있던 그 집은 어린 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면 회색 하늘 아래 그 집 창문은 유독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한 번은 어른들이 그 집에 포도를 주고오라는 말에 뒷집에 사는 형(누구와 함께 갔는지는 역시 정확하지 않다)과 함께 그 대문 앞까지 가서는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기도 전에 포도가 든 그릇을 문앞에 두고 줄행랑을 친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골목도 '응답하라 1988' 속 쌍문동 골목과 참 많이 닮았는데...... 드라마 속 골목도 재개발로 사라졌고,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도 역시 재개발로 사라졌다.

위에 보이는 사진은 내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재개발 되고 들어서 아파트 단지이다. 입주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새 아파트니 당연히 살기는 편하겠지. 작년 가을 이 근처에 갔다가 우연히 아파트 입구를 보고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생각을 했다. 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는 구석 구석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에는 우리 가족과 같은 서민들이 대부분이었을 텐데, 같은 곳에 들어선 아파트는 서민들이 살기에는 부담스러워 보인다. 요즘 아파트 단지는 입구에 외부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기를 설치하는 게 보통이다. 이 아파트는 외부 차량은 물론, 외부인도 출입할 수 없다. 사진에도 유리문이 보인다. 출입증이 있어야 하고,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다. 외부인은 아무리 "열려라 참깨!" 외쳐봐야 소용 없다. 재개발로 골목이 사라졌고, 공적인 공간이던 골목을 오갈 권리도 사라졌다. 물론 아파트 단지는 사유지라 출입을 막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요새 경관'이라는 용어가 있다.

요새 경관은 안전, 보호, 감시와 차단을 중심으로 디자인된 경관 전반에 대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수용할 수 있는 다른 개념으로는 보안과 방어, 과대망상증적 경관을 포함한다.
- 팀 홀, '도시 연구' 중에서

'요새 경관'은 미국을 비롯한 일부 서구 대도시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다. 공부를 하면서도 "저런 건 아직 우리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 보인다. '과대망상증적 경관'이라고까지 하기는 무리겠지만 옛날과 비교해서 보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고, 사진 속 아파트 단지와 같은 곳이 더 늘어나리라 생각된다.

내 어린 시절, 골목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이웃과 관계를 맺는 공간이었다. '응답하라 1988' 속 골목이 딱 그런 모습이다. 그 옛날 골목이 변해 아파트 단지 안 공터가 되었을텐데 옛날 골목과 같은 곳 같지는 않다. 겹겹으로 둘러 친 보호막이 과연 안전을 보장해줄까? 그 옛날 골목길에 뛰어놀던 아이들의 안전은 골목 모퉁이에 있는 구멍가게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어른이, 골목 어귀에 모여 오손도손 수다 떨던 엄마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옛날 골목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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