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7.
무작정 나서는 답사 1 - 동래읍성
동래읍성 답사 지도
부산에서만 30년도 더 살았는데 아직도 부산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없는 지식이라도 쥐어짜서 뭐라도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어보려 한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을 이용해서 부산 곳곳을 답사하고 간단하게 정리해볼까 한다. 오늘은 그 첫번재로 동래읍성이다.
동래읍성을 첫번째 답사 장소로 정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라도 해도 크게 틀린 건 없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내가 살던 곳이 바로 오늘 답사한 동래읍성 근처였다. 지금은 재개발 광풍에 옛 골목은 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 길을 다시 따라가보고 싶었다.
2016. 3. 12.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 2015)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이 세 문장이 소설 속 오베라는 남자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 아닐까? 세상을 흑과 백으로 본다는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베는 원칙을 지키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남이 한 일을 일러바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그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 이웃집에 든 도둑의 칼에 찔려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주거지에 차를 몰로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강조하는 사람이 오베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오베는 고집불통에 막무가내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는 말 속에는 그를 향한 불편한 시선이 묻어있다. 그런 오베지만 그의 아내 소냐에 대한 마음은 흑백이 아니라 아름다운 색깔을 가졌다. 오베가 소냐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아마도 오베에게 소냐는 세상 모든 아름다운 색,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오베가 그녀를 따라 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의 계획은 번번히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한편 재미있으면서도, 오베라는 남자가 남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런 고집불통 영감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만약 내 주변에 오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오베를 불편해 하는 건 아마도 그의 원칙을 고수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품때문이리라. 보통 사람들은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소신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은 참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원리와 원칙을 지키자고 하는 사람을 두고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특히 그 불편함을 참아야 하는 사람이 나라면 그 비난은 더욱 거세진다. 재미있는 일이다. 내가 하면 로멘스요, 남이 하면 불륜인 건가?
소신과 원칙을 지키며, 사회에서 정한 규칙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은 말로는 쉬울지 몰라도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닌 듯 하다. 밤 늦은 시간, 거리에 차는 없고 건널목은 빨간불, 보는 이도 없다. 그래도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 건널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2016. 3. 9.
엄마 생각
도서관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벽을 등지고 앉는 자리다. 지금 내가 앉은 자리가 딱 그렇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모대학교 캠퍼스의 도서관 열람실에는 큰 액자가 걸려있다. 두 개의 큰 일반 열람실에 각각 두 개씩이니 모두 네 개다. 모두 넉 자의 한자를 가로로 적은 것인데, 배움이 모자라 아는 글자도 있고 모르는 글자도 있다. 당연히 뜻은 모른다. 그래도 국립대학교의 도서관에 걸릴 정도면 꾀나 유명한 이가 쓴 글씨일텐데 아쉽게도 이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이들 중에서 그 높은 뜻을 알아줄 이는 없는 듯 하다. 아니, 뜻은 고사하고 액자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 머리 위에 걸려있는 액자는 그렇게 무관심 속에서도 잘도 그 긴 시간을 버텨왔을테다. 멋진 글씨를 표구해서 잘 걸어놓았는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씨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던 비닐필름이 떨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상태로 봐서는 꾀나 오래 된 듯 한데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도서관 열람실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는 행색이 거지 꼴을 한 이몽룡 같은 액자를 오늘에서야 발견하신 모양이다. 그길로 도서관 사무실에 알리셨고, 이내 한 남자 직원이 왔다. 떨어진 비닐을 좀 뜯는가 싶더니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남자는 아주머니께 비닐만 잘 때라고 아주머니께 지시를 하고는 사라졌다.
거 좀 떼주고 가면 좋았을 것을, 아주머니는 닿지도 않는 손을 연신 뻗어보지난 어림도 없다. 그 일이 자기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좀 해주고 가지. 그 남자가 야속했다. 결국 나는 보던 책을 덮고 일어나 아주머니를 도와 비닐을 떼어냈다.
시내 어느 건물 청소를 하시는 엄마 생각이 났다. 누가 청소한다고 무시하진 않는지, 거기는 자기 일 아니라고 야속하게 돌아서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지......
2016. 3. 1.
책만 보는 바보(안소영 지음, 강남미 그림; 진경문고; 2005) - 조선판 흙수저의 씁쓸함에 대하여
'책만 보는 바보'
조선 정조 대의 학자이자 문인 이덕무는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看書痴)'라 했단다. 일년을 가도 책 한 권 안보는 사람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는 가당치 않은 별명이다.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눌한 이나, 한 가지 일에 빠져 다른 건 생각도 못하는 이를 사람들은 '바보'라 한다. 이덕무가 스스로 바보라 한 것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는 정말 책이 좋아 그리했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책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일 책에 파묻혀 사는 백면서생으로 보였을 지 모르지만, 반상의 구별이 엄격한 시대에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 겪는 설움이 묻어나는 듯 해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책만 보는 바보 곁에는 그의 처지를 잘 알아주는 벗들이 있었고, 힘겹게 젊은 날의 아픔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 스승도 있었다. 당대의 이름 난 학자였던 홍대용과 박지원은 이덕무의 벗이었던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이서구 등의 스승이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이름난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스스로 벼슬길에는 큰 뜻이 없었던 이들이었다면, 이서구를 제외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는 모두 서자 출신이었다. 그들이 모두 정조대에 활약했던 이들이니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 18세기 후반은 그들이 모두 피끓는 청춘이었을 때다. 250여년 2015년을 지나 2016년을 버텨내고 있는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가 너무나도 많아 보인다. 물론 나라고 예외일 순 없다.
당대 이름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홍대용, 박지원과 함께 시대를 고민했던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은 젊은 시절 서자란 출신의 한계에 아파했다. 물론 나중에는 정조라는 훌륭한 임금이 그들을 가까이 두고 쓰긴 했지만 그들의 포부와 능력에 비하면 아쉬운 자리였다. 2015년을 넘어 2016년을 관통할 단어를 꼽아보자면 여럿 있겠지만, '흙수저'도 빠지지 않을 것 같다. 누구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을 쓰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서로는 나누게 될테니 그런 말은 쓰지 말자는 이도 있다. 찬성한다. 하지만 이 시대를 관통하는 말이란 점은 씁쓸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려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를 이덕무와 그 친구들과 견주어 보는 건 어떨까? 어린 나이에 당으로 건너가 과거에 장원급제할 만큼 최치원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저 많이 똑똑한 6두품이 아니었을까? 물론 최치원이 전국을 누비며 자신의 발자취를 참 많이도 남겨놓아 후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은 똑똑히 기억을 할지 모르지만, 그런다고 6두품 출신 꼬리표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 이 또한 씁쓸하다. 이덕무가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칭하고 책 속에 묻혀 살았다면, 최치원은 전국을 떠돌며 시를 썼던 건 아니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심각하게 얘기하면 덜컥 겁이 난다. 하지만 이덕무에서 2016년을 살고 있는 수 많은 이덕무들과 최치원을 생각해보면 역사는 묘하게 돌고 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과 조선의 서얼,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흙수저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가지려고 애써 얻은 꼬리표가 아니란 점이다. 그저 내 아버지가 6두품이었고, 내 어머니가 양반이 아니었건, 아버지 또한 서얼이었기 때문에, 내 부모가 열심히 살았지만 나에게 물려줄 재산이 얼마 없을 뿐이다. 또 내가 원한 것도 아닌 꼬리표지만 6두품과 서얼이란 꼬리표는 때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했고, 흙수저란 꼬리표는 때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는다.
최치원이 세상이 버린 게 900년이었고, 신라는 935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은 1800년을 전후로 하여 세상을 버렸고, 한 세기가 지날 즈음 조선은 이미 국운이 저물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을 '헬조선'이라 이르고, 스스로 지옥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미래가 있을까? 답은 최치원과 이덕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치원과 이덕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였다. 흙수저 또한 마찬가지라 본다. 못살겠다 아무리 외쳐본들 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가 보다. 눈을 떠야 보이고, 귀를 열어야 들린다. 눈을 뜨고 현실을 좀 보라고, 귀를 열고 외침을 들으라고 끝없이 외쳐야겠지만, 쉽진 않아보인다. 그래도 나는 내 방 구석에서라도 외쳐볼란다. 2016년 97주년 3.1절에 2016년을 살아가는 이덕무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