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재미있다.
'책만 보는 바보'
조선 정조 대의 학자이자 문인 이덕무는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看書痴)'라 했단다. 일년을 가도 책 한 권 안보는 사람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는 가당치 않은 별명이다.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눌한 이나, 한 가지 일에 빠져 다른 건 생각도 못하는 이를 사람들은 '바보'라 한다. 이덕무가 스스로 바보라 한 것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책만 보는 바보는 정말 책이 좋아 그리했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책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일 책에 파묻혀 사는 백면서생으로 보였을 지 모르지만, 반상의 구별이 엄격한 시대에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 겪는 설움이 묻어나는 듯 해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책만 보는 바보 곁에는 그의 처지를 잘 알아주는 벗들이 있었고, 힘겹게 젊은 날의 아픔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 스승도 있었다. 당대의 이름 난 학자였던 홍대용과 박지원은 이덕무의 벗이었던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이서구 등의 스승이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이름난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스스로 벼슬길에는 큰 뜻이 없었던 이들이었다면, 이서구를 제외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는 모두 서자 출신이었다. 그들이 모두 정조대에 활약했던 이들이니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 18세기 후반은 그들이 모두 피끓는 청춘이었을 때다. 250여년 2015년을 지나 2016년을 버텨내고 있는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가 너무나도 많아 보인다. 물론 나라고 예외일 순 없다.
당대 이름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홍대용, 박지원과 함께 시대를 고민했던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은 젊은 시절 서자란 출신의 한계에 아파했다. 물론 나중에는 정조라는 훌륭한 임금이 그들을 가까이 두고 쓰긴 했지만 그들의 포부와 능력에 비하면 아쉬운 자리였다. 2015년을 넘어 2016년을 관통할 단어를 꼽아보자면 여럿 있겠지만, '흙수저'도 빠지지 않을 것 같다. 누구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을 쓰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서로는 나누게 될테니 그런 말은 쓰지 말자는 이도 있다. 찬성한다. 하지만 이 시대를 관통하는 말이란 점은 씁쓸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려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를 이덕무와 그 친구들과 견주어 보는 건 어떨까? 어린 나이에 당으로 건너가 과거에 장원급제할 만큼 최치원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저 많이 똑똑한 6두품이 아니었을까? 물론 최치원이 전국을 누비며 자신의 발자취를 참 많이도 남겨놓아 후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은 똑똑히 기억을 할지 모르지만, 그런다고 6두품 출신 꼬리표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 이 또한 씁쓸하다. 이덕무가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칭하고 책 속에 묻혀 살았다면, 최치원은 전국을 떠돌며 시를 썼던 건 아니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심각하게 얘기하면 덜컥 겁이 난다. 하지만 이덕무에서 2016년을 살고 있는 수 많은 이덕무들과 최치원을 생각해보면 역사는 묘하게 돌고 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과 조선의 서얼,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흙수저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가지려고 애써 얻은 꼬리표가 아니란 점이다. 그저 내 아버지가 6두품이었고, 내 어머니가 양반이 아니었건, 아버지 또한 서얼이었기 때문에, 내 부모가 열심히 살았지만 나에게 물려줄 재산이 얼마 없을 뿐이다. 또 내가 원한 것도 아닌 꼬리표지만 6두품과 서얼이란 꼬리표는 때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했고, 흙수저란 꼬리표는 때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는다.
최치원이 세상이 버린 게 900년이었고, 신라는 935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은 1800년을 전후로 하여 세상을 버렸고, 한 세기가 지날 즈음 조선은 이미 국운이 저물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땅을 '헬조선'이라 이르고, 스스로 지옥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미래가 있을까? 답은 최치원과 이덕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치원과 이덕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였다. 흙수저 또한 마찬가지라 본다. 못살겠다 아무리 외쳐본들 저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가 보다. 눈을 떠야 보이고, 귀를 열어야 들린다. 눈을 뜨고 현실을 좀 보라고, 귀를 열고 외침을 들으라고 끝없이 외쳐야겠지만, 쉽진 않아보인다. 그래도 나는 내 방 구석에서라도 외쳐볼란다. 2016년 97주년 3.1절에 2016년을 살아가는 이덕무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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