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5.

독일에서 새마을 운동을 벌였다면.....


'새벽종이 올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살기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행가(?) 새마을 노래의 1절이다. 독일은 전쟁 통에 폭격으로 파괴된 곳이 많았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새마을 운동' 같은 걸 벌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만 해본다. 오늘은 이 발칙한 상상에 대해서 풀어볼까 한다.


앞서 언급한 새마을 노래의 2절 가사를 살펴보자.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 살뜰 다듬새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개인적으로는 2절의 가사가 참 인상적이다. 아버지는 고향 기장(현재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을 방문하시면 가끔 어린시절 얘기를 하곤 하셨다. 어릴 때 살던 집이 어디 있었는지, 그때는 기장이 어떤 모습이었고, 지금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등 말이다. 아쉽게도 아버지의 어릴적 기장은 그저 아버지의 얘기를 통해서 상상을 해볼 뿐이다. 암튼 아버지가 나고 나라신 집이 초가집이었다고 하셨으니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나 그 언저리쯤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 그럼 여기서 내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곳은 어떤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머니는 경남 거창의 한 농촌 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부모님의 여름 휴가 때면 거창 외가를 방문하곤 했다. 어머니 어린 시절에는 외가는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이었고, 내 기억에 의존해 보자면 1990년대 초반 당시까지 동네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통 기와집이었다. 안채가 정면 다섯 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이용하셨을 사랑채도 있었고 솟을대문도 있는 큰 집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쯤인가 기와집을 헐고 새로 집을 지었는데, 그때 그 집이 그대로 아직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한다. 기와집이었던 외갓집이 양옥으로 바뀐 후에는 마을에 남아있는 사당을 말고는 한옥이 없다. 역시나 새마을 노래의 가사처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 마을의 모습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래 가사에도 그대로 드러나지만 당시 농촌의 초가는 없애야할 대상이었지 절대로 보존해야할 대상은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11월 2일)에는 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있는 뤼벡(Lübeck)을 다녀왔다. 뤼벡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이름난 곳이다. 아직도 발굴 작업과 도시의 옛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뤼벡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었으니 그 얘기를 이정도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뤼벡뿐만이 아니라 독일의 모든 지역 모든 도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전투와 폭격 등으로 상당부분 파괴되었다. 도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후 복구는 지역을 불문하고 전후 복구 문제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다. 뤼벡의 경우 전후의 폐허를 복구하는 수준은 벌써 넘어섰겠지만, 과거 전쟁 전의 모습을 복원하는 노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뮌헨도 이런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애석하게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킬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전후복구가 한창이던 1950대 독일로 시간을 되돌려 상상을 해보자.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한국의 과거 보릿고개 같은 빈곤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생활도 지금의 독일과 비교해 본다는 팍팍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베이비붐이 나타나면서 인구도 많이 늘고 그랬을 것이다. 한국적인 사고를 가지고 당시의 독일 사회가 안고있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일단 집을 빨리 많이 지어야 했을 것이고, 과거의 불편했던 것들은 이참에 버리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결과는 현재 도시의 외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베를린의 경우에도 서울 도심의 빌딩숲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구 규모가 비슷한 부산의 도심과 비교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대신 100년도 훨씬 넘은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시의 규모에서 오는 차이는 있겠지만 독일의 도시는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유럽의 다른 도시들도 큰 틀에서는 독일 도시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과거 개발 시대,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 보다는 외국의 문물을 우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컸던 것 같다. 그러니 집도 소위 양옥이라는 형태로 뜯어 고치고 도시도 높은 건물이 들어차면 멋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초가집은 어디 특별한 곳에 가야 볼 수 있고, 아파트만 그득 그득 들어차고 있으니 말이다. 현대적인 것도 문명 아름다움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옛 것, 전통의 아름다움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없을텐데도 균형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독일에서 살면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아직도 돌을 깔아놓은 길이 많다는 점이었다. 편한 아스팔트 포장을 하지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길은 도로 공사를 하더라고 공사가 끝나면 다시 돌을 예쁘게 깔아놓는다.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울퉁볼퉁한 길 덕에 안마는 제대로 된다. 자동차를 타고 지난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뭐 길이 이러니 과속할 일은 없다. 과속해봐야 자기만 손해일테니까. 그런데 뤼벡에서는 좀 다른 생각을 하게되었다. 꼭 모든 기준이 편리함일 필요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 가지런하게 잘 깔린 길은 고풍스런 멋이 나는 게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보행자가 중심이라면 자동차를 위해서 도로를 매근하게 포장하는 건 고려하지 않아도 될 일일 수도 있다. 물론 뤼벡이 잘 가꾸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구시가지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관광객만을 위한 박제된 도시가 아니라 그곳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구시가지의 외곽은 여느 도시의 주택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곳도 있었다. 구시가지 외곽 주택가에는 돌을 깔아놓은 길 위에 아스팔트로 포장을 했다가 아스팔트가 벗겨진 그런 곳도 있었다. 아스팔트 포장이 꼭 필요했다면 다시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도로를 방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아스팔트 포장 안해도 사람 사는 데는 큰 지장 없겠다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런 길은 새마을 노래의 가사를 따랐다면 돌은 다 들어내고 길을 편평하게 잘 고르고 포장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노래 가사처럼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한국의 도시를 독일의 도시와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것은 뭔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개발의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서구적인 사고와 생활 방식을 보이게 보이지 않게 강요해 왔고, 그것이 지금의 한국 사람들의 생활과 그 터전을 바꿔왔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맛과 멋, 그리고 색을 - 그것이 꼭 전통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대도시에서 재개발을 한다는 곳들은 개발 시대의 피로가 쌓여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피로를 어떻게 잘 푸는 가가 중요한 거라 생각한다. 과거의 개발 논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각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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