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을 출발한지 3시간이 조금 더 걸려서 드디어 목적지인 쥘트에 도착했다. 역은 연휴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 여름 휴가철에는 지금보다 더하겠지...... 역이 위치한 베스터란트(Westerland)는 남북으로 40킬로정도 길게 늘어진 섬의 한 가운데 위치한다. 섬의 북쪽 끝까지는 약 20킬로미터. 자전거를 가지고 왔지만(독일은 자전거용 차표를 따로 구입하면 자전거를 가지고 기차를 이용할 수 있다) 혹시나 해서 버스편을 알아봤더니 비싸서 바로 포기했다. 참고로 쥘트에서 운행중인 버스는 뒤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다. 물론 따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있는 건 몸뚱아리 뿐인데 그냥 달려보자.
혹시나 해서 전날 인터넷에서 PDF파일로 된 지도를 다운받아서 스마트폰에 넣어놓기는 했는데 영 답답하다. 그냥 별 고민하지 않고 북으로 일단 방향을 잡았다. 30~40분 정도 달렸나 왼쪽으로 묘한 지형이 보이기 시작한다. 낮은 언덕들이 펼쳐지고, 그 위로 작은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다. 거대한 사구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세우고 사진을 몇 장 찍다보니 언덕 위에 올라가면 뭔가 좀 더 시원한 장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길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 이슬이 체 마르기 전이라 습기를 머금은 모랫 길 위로 자전거를 끌고 가다보니 자전거는 온통 모래투성이다. 몇 분 그렇게 자전거를 끌고 사구 깊숙이 더 들어가니 전망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독일에서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단박에 태안의 신두리 해안사구가 떠오른다. 신두리 해안사구를 가보기는 했지만 깊숙이 들어가보지는 못했는데, 규모로 보면 쥘트의 사구 규모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구 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와 풀을 걷어내면 그냥 사막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작은 모래 언덕도 보이고 다양한 지형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리니 파란 바다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빈도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를 다시 내려가 사구 사이로 난 나무 데크를 따라서 바다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낮은 사구를 하나 넘어가니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 길게 늘어진 사빈을 내려다 보는 장관이 펼쳐진다. 집에 돌아와서 사진을 정리하다가 ‘붉은 절벽(Rotes Kliff) 위의 사구경관 자연보호구역’이라고 적혀있는 안내 표지판이 찾았다. 사빈, 절벽 아래 사구, 붉은 절벽 그리고 절벽 위의 넓은 사구...... 멋진 조합이다. 파란 하늘과 북해의 바닷물, 하얀 모래, 그리고 붉은 흙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색의 조합도 예사롭지 않다. 이리 저리 사진을 찍으면 한참을 절벽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는데 퍼뜩 드는 생각. '이 절벽이 해안단구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발 아래로 붉은 흙 사이로 자갈이 박혀있는 게 보인다. 아무런 정보 없이 찾아온 곳이기에 이렇게 혼자 추측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돌아와서 검색을 해보니 절벽의 퇴적물은 약 12만년 정도 된 빙하 퇴적물이고, 마지막 빙기가 끝난 후 지반이 융기했다고 한다. 현재는 침식에 따른 지형파괴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데, 한눈에 보아도 여기 저기 심한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빈은 규모가 상당하다. 남북으로 곧게 뻗은 사빈에 일정한 간격으로 그로인이 설치되어 있다. 몇 년전 찾아갔던 포항의 송도해수욕장이 떠오른다. 흐린 하늘이 그날의 느낌이 더욱 강렬하게 했다. 암튼 이곳에서도 역시나 사빈의 침식은 꾀나 오랫동안 고민을 해온 문제이고, 아직도 여전히 진행중인 환경문제인듯 하다. 오후에 찾아간 북쪽 해안의 사빈에도 규모는 작지만 역시나 그로인이 설치되어 있다. 얼마 전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학생에게 들었더니, 이곳에서는 매년 쓸려나간 모래를 바다에서 퍼서 사빈에 다시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이곳 쥘트의 관광업을 생각한다면, 이곳 사람들에게 모래는 당연히 보호해야 할 자연환경 그 이상의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여행이 마냥 좋은 일만 계속되란 법은 없다. 역시 하나씩 뭔가 발목을 잡는 일이 일어나야 좀 더 기억에 남게 된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뒷바퀴 바람이 쭉 빠져있다. 엉덩이가 아프다 했더니 어디서 타이어가 터졌나보다. 자전거 가게를 찾았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2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단다. 다른 곳을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안된다고 하고, 꼼짝없이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서야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자전거 타고 여행하면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해가 거의 질 무렵 킬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역으로 가던 길에 다시 터졌다. 아저씨 수리하는 게 영 미덥지 못하다 했더니 결국은...... 그래도 역에 거의 다 와서 그랬기에 천만다행이다. 암튼 자전거 수리를 하고는 섬의 북쪽 끝으로 향했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섬의 서쪽 해안의 사빈은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다시 사취가 자란다. 스마트폰의 GPS 어플로 좌표를 확인해 보니 55.04743°N, 8.46006°E,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독일의 가장 북쪽 언저리 나는 와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북해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가야겠다. 가끔 수영 하는 사람들도 보이는데 물은 상당히 차다. 동쪽으로는 아스라이 덴마크의 해상풍력발전 단지가 보인다.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베스터란트로 돌아간다. 역시나 돌아가는 길은 힘은 들고, 재미는 없다. 역 앞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해결하고 역으로 갔더니 막 출발하려고 하는 열차는 이미 만원이다. 그 열차를 보내고는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후숨에서도 한 시간. 킬 역에는 자정이 다돼서야 도착했다. 그리고는 또 힘들게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니 12시 반을 훌쩍 넘겨버렸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고, 타이어가 두 번이나 터지면서 고생도 했지만 독일에서 보낸 가장 의미 있고, 신나는 하루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섬의 남쪽을 둘러봐야겠다. 그때는 갯벌을 주로 보아도 좋을 듯 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