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동해바다랑 소나무들이 있어서 7번 국도가 아름답다고들 하지만요, 저런 어촌마을이 있고 그 안에 저렇게 사람 사는 모습들이 있어서 이 길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가다 만나는 마을들은 꼭 이름을 한번씩 불러줘야할 거 같아요. 안그러면 서운해 할 거 같아서. 병곡, 후포, 평해, 월송, 덕산...."
영화 '가을로' 속 대사다. 도시인의 눈으로 어촌마을의 생활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저 영화 속 장면 처럼 차를 타고 스쳐지나며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딱 그정도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름다운 동해를 끼고 앉은 마을은 영화 속 대사처럼 이름을 한번씩 불러줘야할 것 같을 만큼 아름답다.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와 나란히 길이 났다. 동해를 지키던 철책을 걷고 군인들이 투박한 군홧발로 밟던 길은 이제 여행자들의 몫이 되었다. 이름도 예쁜다. '해파랑길'이란 이름은 곱씹을 수록 참 잘 지은 이름이다 싶다. '바다와 파도의 길'이란 이름만큼 이 길을 잘 설명해줄 설명이 또 어디 있을까? 한편 '해'는 바다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지만 하늘에 떠 있는 '해'라도 해도 될 듯 하다. 바다를 따라 나란히 걷는 길은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함께하지만 내리쬐는 해도 함께하는 길이니 말이다.
지난 목요일(4월 28일)부터 어제(5월 1일)까지 포항에서 출발해서 평해 월송정까지 바다를 따라 걸었다. 차를 타고 지나는 길에는 그저 스쳐지나는 풍경이 걷는 이에게는 좀 더 오랫동안 머문다. 그만큼 이런 저런 생각도 함께 지나간다. 도시인의 눈으로 보는 바닷가 마을의 생활은 일상에서 보는 것과는 영 다른 색다른 풍경 정도일 것이다. 며칠 걷는다고 내가 동해안 어느 마을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달리 보이는 것도 있었다.
경북의 동해안은 해안과 나란하게 달리는 태백산맥에서 뻗어나온 산이 바닷에 딱 붙어 서있다. 강릉에서 북쪽이 해안이 긴 백사장이 어어진 모래 해안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바다를 마주하고 앉은 마을은 바로 뒤에 산을 두고 있다. 작은 어항을 끼고 있는 곳도 있고,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 포항 쪽에는 그래도 마을 뒤로 농사지을 땅이 있었는데, 영덕 쪽은 농사지을 땅이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다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은 어항이라도 끼고 있는 마을은 어김없이 해신당이 있다. 얼마전에는 올해 풍어제도 지냈나 보다.
파도가 들이닥치는 바위 위에서 기다란 장대를 들고 미역을 건지는 이들과 그 미역을 정성스럽게 네모나게 널어 말리는 이들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욕심을 낸다고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미역을 건질 수는 없을테지만 그래도 미역은 바다가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격에 따라 잘 말린 미역은 스무 개씩 묶어 13~15만원 정도 받는다고 한다.
만선의 꿈도 좋고, 미역 말려 팔아 번 돈이 아무리 쏠쏠해도 바다를 마주하고 사는 것은 무서운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을마다 지진해일 대피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있고, 파도가 센 날은 파도가 방파제를 넘는 일이 없으란 법도 없다. 성난 파도도 멀리서 바라보면 그림 같을 수 있겠지만, 바다를 매일 마주하고 사는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까?